‘나에게 ’만다라’는 스스로를 투영하는 ‘거울’이자, 본질적 형상을 드러내는 시각적 형태이다. 다양한 형태의 표현 중 ‘욕망’을 형상화 하는 것에 본능적으로 이끌려, 불교의 오욕을 기반으로 한 식욕, 수면욕, 성욕, 재물욕과 현대적 관점에 ‘자유욕’ 을 추가하여,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욕망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했다.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지금, 경로당의 적막한 공기를 그대로 담았다.
집 같지만 집이 아닌 공간 속, 묘하게 언밸런스한 인테리어와 물건들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공동체의 흔적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정원이나 자연을 도심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자연은 우리가 사는 공간 바로 곁에 있다.
‘정원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도시의 틈 속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돌보고 가꾸는 손길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놀이터는 물리적 공간인 동시에 시대의 흐름과 개인의 경험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는 사회적·정서적 장소이다. <Framing Playground>는 사진을 매개로 감각과 상상을 확장시키는 하나의 아카이빙 놀이로 기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놀이터를 관찰과 놀이의 대상으로 삼아, 프레이밍-시각적 장치를 통해 시선의 재구성에 대해 탐구한다.

유년 시절부터 살아온 동네의 독거노인들이 살아가는 집의 마당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사별 후 홀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당에는 쓰임을 다한 물건과 여전히 사용되는 물건이 뒤섞여 놓여 있으며, 그 안에는 삶과 기억, 부재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독거놓인’은 ‘독거노인’과 ‘놓이다’를 합성한 표현으로, 홀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그 마당에 놓인 물건들을 함축한다. ‘쌓기’라는 행위를 통해 일상적 물건들을 새로운 맥락의 오브제로 재구성하며, 사소한 일상을 기념하고자 한다.

움직이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몸은 쉽게 따라주지 않는다. 현실의 공간 속에서 부유하듯 있는 인물은 무중력 상태에 놓여있다. 연출된 그럴듯한 공간 속에서, 마침내 불안의 실체와 마주한다.
이 작업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오가며, 불안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간극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잊혀진 공간인 송현 자유시장은 한때 사람들의 일상과 시간이 뒤섞였던 장소였다.
폐쇄된 골목과 빛의 방향 속에서 사라져 가는 풍경들, 잊혀진 시선과 단절된 기억을 포착하고 분산된 원근과 파편화된 시점을 통해 공간의 해체와 시간의 잔향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한다.

부산 해운대구 장산에 출몰한다는 도시괴담 속 존재 장산범을 공포의 대상이 아닌 신비롭고 낯선 존재로 재해석하였다. 목격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상을 참고해 그를 연출한 장면과 이야기의 배경이 된 장소인 산의 풍경을 통해, 실존과 허구 사이에 놓인 존재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다.

수많은 인간의 삶과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옷산’의 형태를 주요 소재로 삼는다.
이 작업은 환경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형태 자체에 대한 미학적 탐구에 집중한다. 비정형적으로 이루어진 ‘옷 산’은 전통 산수화의 미학을 빌려 ‘인공 산수’의 풍경으로 재해석되었으며, 흑백의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본 이 낯선 풍경은 아름다운 조형적 가치를 드러낸다.

살았던 공간을 방문하는 것은 장소애착을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행위 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 사진이 존재한다.

유년의 시간 속을 유영하며 알알이 만져본 추억을 공유하는 이 작업은 나의 가장 내밀한 기억을 문화적 기억으로 승화한다.

과일을 상처 받은 대상으로 촬영했다. 누구에게나 크거나 작은 상처들 을 가지고 있다.

상처들을 색실로 꿰매서 치유하며, 또한 주변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소소한 것 들이 돌이켜보면 힘이 된다.


오락실의 색, 빛, 조형 등 구성 인테리어들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색감의 빛과 조명들은 우리를 매우 흥분하게 만들었고, 환각과 중독 을 일으키는 시각의 마약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공간과 심리적 관계에 대해 극사실적으로 재현하며 부분을 즉물적으로 수집하고 프레이밍 하는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우주와 나의 모든 부분이 연결되어 있음을 캔버스 위에 담아내었다. 나의 우주를 내가 좋아하는 책, 영화, 전시, 어린시절, 미래, 미지의 세계 로 표현했으며 사진을 구겨 모든 것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사진 덩어리에 캔버스의 색깔을 묻혀 나의 본질과 나를 구성하는 것들 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물의 본질은 개인이 사물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의해 결정되며 어떠한 대상에도 고유한 본질이란 없다.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익숙하 지 않은 존재일 뿐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아닌 나만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체이다.

<대장장이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보석을 다듬어 탑의 왼 쪽 귀퉁이를 꾸몄습니다. 정원사는 형형색색의 꽃들로 아치 모양의 공 장 출입구를 만들었습니다. 목수는 … (중략) … 그렇게 마을 광장에 갑작 스럽게 생겨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은 모두의 땀과 정성이 뒤섞 여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각 장면들을 시각화한 뒤 이를 사진으로 촬영한 작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 중 하나인 회피 심리를 직면하고자 시작한 작품, 나체로 카메라의 시야 안에서 어떻게든 숨으려 연기하며 도망칠 때의 심리 작용을 이해하려 했다.

내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릴 때 그들의 초상은 원래의 모습보다 희미한 형태와 강렬한 색감이 조화를 이루는 흐릿한 이미지이다. 누군가는 사람을 기억할 때 시각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나는 시각보다 감각, 감정, 기억에 의존한다. 나에게 이들은 여전히 이 이미지 그대로 존재해 있다. 그렇기에 이 이미지는 누군가에게는 추상화이지만 나에게는 사실화이다.

단일보다 다양을 선호하는 취향에 따라 단일로서 존재했던 여러 자연물을 모아 콜라주하여새로운 커스텀 혼합종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흔적을 남긴다.
나는 그 흔적의 시간이 타인에 의해 짧았던 20대의 어느 한 사람(피해자)의 모습을 실제사건을 토대로 재연했다. 참사나 유명인들의 죽음 또한 빠르게 잊혀져 가는 시대에 어쩌면 이웃이었을지 모를 그들에게 손을 뻗어 애도를 표하고 있다.

나에게만 보이는 작고 검은 선, 내 몸의 일부 나의 눈썹. 나의 시선이 머무는, 나의 일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은 사건에 집착했다.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느낀 찰나의 경험을 시작으로 나는 그 위에서의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긴 시간 지켜보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은 다양하고 자유로웠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자유와 치유를 경험했다.

이식된 자생수목을 통해 자생수목의 의미와 수목 이식, 관리 행위의 의미간의 충돌을 고찰했다. 즉,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목적이지만, 실질적으로 자연을 개입, 보호 관리 등의 통제에 이르는 모순적 현상이다.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진 나의 내면의 공간과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은 외면의 공간, 꽃이라는 대상의 형태로 ‘나’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디스토피아 영화보면서 방독면, 전신 보호 장비 없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코로나19 겪으면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저 픽션으로 넘겨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방독면과 우비를 강박증을 극대화 시켜서 현실 속의 나 자신이 디스토피아 상상의 매개체로 증명하기 위해 표현하였다.

19세기 사진의 발명 이후 기록된 사후/초상사진을 수집 및 선정 후 AI를 활용하여 컬러를 복원하고 당시 현장을 프롬프트로 작성하여 아웃페인팅으로 재구성 한 뒤 빈티지 풍 액자에 넣어 ‘나’를 유리에 투영하여 촬영하였다.

직접 키우는 식물이 작업의 소재이며, 식물마다 연상되는 주변 인물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촬영하여 검 프린트 방식으로 수채화지에 현상 인화하였다.

실제 연인인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이’를 연기해주길 부탁했다. 이들이 하는 어색한 ‘연인 연기’는 관람자에게 사진 속 연인들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혼돈을 주며 불완전한 사랑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살아있는 몸만이 통증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통증을 겪고 난 흉터는 몸에 남겨진 시간의 형태이다.
나는 사진을 매체로 몸의 형태와 살갗을 기록하며, 픽셀을 증식시켜 돌연변이의 형태를 갖추게 한다.
남아있는 미세한 균열들은 우리가 실재했던 시간의 증거이다.
질 들뢰즈는<감각의 논리>에서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 되어진 신체’라 말한다.
나는 작업을  통해 몸의 일부를 유희하여, 우리 몸 전체의 기억과 감각을 탐구한다.

어느 날 나는 분명히, 다리 밑에서 내가 듣는 어떤 소리를 두 눈으로 보게 된다.

그 곳에서 내가 듣고 보던 어떤 소리와 형상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다리 밑 구조는 내 귓속과 두 눈을 닮아서 인지, 내면의 소리를 보고 듣게 된다.


물건은 수없이 반복되는 행위들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이내 손길의 기억을 간직한다.

나는 그러한 물건들을 더미로부터 꺼내어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고요히 떠있는 물건과 함께 부유하는 나의 무의식은 자유롭고 또 아름답다.

그 순간은 내 안에 있는 필요보다 너무 많았던 무언가를 꺼내 놓을 때 가능하다.

난 이 작업을 통해 사물과의 소소한 관계를 동화처럼 음미하고 싶다.

우리의 일상 속 평범한 공간에 색을 가진 투명 물체의 등장으로 또다른 형태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색을 가진 투명 물체를 투과한 빛은 그와 닮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일상 속 공간도 어떠한 시선으로 담느냐에 따라 기하학적인 표현이 가능하고, 그 기하학적인 배경의 틀에 빛의 방향과 카메라의 시선을 이용하여 여러 형태의 도형을 형상화할 수 있다.

또한, 물체의 배치에 대한 착시를 일으키고 그림자의 색과 도형의 탄생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페르소나는 저장된 것들이다.

원치 않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 때 그 때 꺼내어 사용한다.

본인의 진실한 감정이 아님에도.

우리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가면을 벗고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벗어 던진 허물들은 기괴하지 않다.

그저 우리들의 모습이다.

쓰임새를 다한 물건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자 한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평범한 풍경 속에 쓰임새를 다한 물건을 조형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여를 통해 애정과 유희를 포함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 작업을 위해 나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곳을 배회해야 했으며, 발굴된 풍경과 대상들은 나의 작업으로 인해 유의미한 오브제가 되었다.

관객은 어느새 이들을 미적 존재로서 바라보게 된다.

인류는 지속적으로 모든 것을 소비해 왔으며, 나를 포함한 현대인은 그 사회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야 한다.

소비주의 사회가 지속적으로 되면서 음식물은 넘쳐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식을 소중히 여길 필요를 못느끼게 되었다.

현대사회에 기계화되어 생산된 음식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음식을 먹게 하는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머리에 얹고 음식을 집어삼켜 괴물이 되는 느낌의 초상 사진을 표현하였다.

혹시 너의 바다는 슬플까.

닿지 않는 소리와, 흘려보낸 눈물이 너의 주위를 시리도록 차갑게 만들었을까.

p.s. 내가 지나치지 못한 장면들을 엽서로 보내. 너만은 이해해주길 바라.

퍼포먼스 작업 <Letter Project>는 참여자들이 서로를 모르는 채로 편지를 쓰고,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매개자가 되어 편지를 전해주고, 각각 다른 시공간 속에서 편지를 읽는 그들의 모습을 사진과 음성으로 기록한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은 모호하기 때문에 누구나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작업이 익명의 관객들에게 부치는 편지가 될 수 있길 바래본다. (작업노트 中)


사람의 존재가 사라진 건물은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비어 있지만 

그 자리를 자연이라는 존재가 다가와 그 공간이 채워지고 있다.

단지 사람이 떠나간 것으로 그 곳을 빈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짐과,

자연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모습을 통해 해답도 함께 얻을 수 있는 작품이다.

비슷한 구조에서 오는 옛 추억의 향수, 남겨진 물건들 속에서 보이는 사라져 가는 생활상, 무너져가는 건물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쓸쓸함.

‘104마을’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남아있다.

이렇게 떠나간 많은 감정이 가슴에 담겨 아무도 없는 이곳이 낯설고 아련하여 한편으로 경외감마저 들기 시작한다.

복잡한 감정의 미세한 충돌에서 오는 낯선 인상 속 이면의 아름다움을 적외선에 파노라마로 작업하여 사라져 가는 곳에 대한 넓고 따뜻한 기억을 담아냈다.


‘책마다 다른 결말을 띄는 동화의 이야기들을 한 장의 사진에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진이 될까?’ 라는 생각이 작업의 출발점이다.

동화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오브제가 한 장의 사진 속에 조합되고 배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한 곳에 모인 오브제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뿜어내게 된다.

그들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들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채로운 의미로 해석되어, 사진이 개인에게 새로운 작품으로 다가오기를 바란다.

할머니와 관련된 순간을 추적하고, 수집하여 구성한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건, 어쩔 수 없는 망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흐려지는 기억의 편린들 속에서 사진을 통해 기억을 고정시킨다.

다시 만나게 된 과거의 조각을 마주하며 ‘나’ 는 더이상 슬픔과 존재하지 않게 된다.


불행이 없다면 완전한 행복은 없다.

미래 사회, 다가오는 디지털 사회를 불안정한 시선에서 바라본다.

감정의 형태가 아닌 본능적 시스템에 의해 분열해 나가는 바이러스를 통해 미래 사회의 인물상을 구현한다.

이 바이러스에 형과 색을 더해 마치 미래 사회의 인간의 모습을 상상했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 사회의 모습, 디스토피아의 초상을 만들어냈다.

물감, 색연필 등의 명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용색명(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색명)은 회화와 뗄 수 없는 존재이다. 회화의 분야 중 하나인 정물화를 사진과 접목하여 표현하였으며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일을 소재로 삼았다. 배경과 물체를 직접 칠하고 그 모습을 촬영함으로써 관용색명을 재해석하여 우리가 익숙하게 느꼈던 물체의 색에 대하여 새로움을 탐구하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 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자 미의 기준이다. 누군가에게 고마움, 감사를 표현하고 싶을 때 꽃을 선물하지만 아쉽게도 자연의 상태에 있는 꽃은 색이 없어지며 시들게 된다. 그에 비해 조화는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화로 꽃의 영원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기록하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 할 수 있는 건 반복되는 하루와 그곳에 존재하는 ‘나’이다. 새벽시간, 일상에 속박된 ‘나’는 사라짐과 동시에 무대 위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

현재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존재를 떠올려 보자.
그 익숙하고 당연한 존재를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있는가?
‘당연하다’라는 말은 참 고마우면서도 잔인하다. 나는 그 수 많은 고맙고도 잔인한 존재들 중 ‘몸’을 떠올렸다.
몸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한 존재다. 매일 마주하며 입히고 씻기지만, 익숙하기에 당연하다. 사람의 몸을 하나의 오브제로 형상화하여 예술의 선의 요소를 사용해 새로운 시각으로 비틀어 재시각화함으로써 ‘몸’의 예술성을 실험해보았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가까웠던 모든 것들이 어쩌면 가장 새로운 존재로 다가올 수 있다.

이 곳에서는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지고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작은 사건들만 존재한다. 여기서 존재하는 이미지 조각들은 청년인 내가 보고 느끼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가져왔다. 이러한 심리적 장면들은 맥락을 가질 수 없는 상태 그 자체이며 모두 빌려온 감정들의 장면이다. 마치 우리들의 불안처럼.

책을 엉뚱하게 사유하는 생각은 행위의 기록을 통해 마침표를 하나씩 찍어갔다. 책은 더이상 나에게 부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신체보다 훨씬 크고 경이로움을 주는 대상을 여러 시점과 각도를 통해 평면화된 이미지 내에서 마치 절대자의 시선으로 전체를 세밀하게 바라볼 때, 기존 건축 사진을 볼 때와는 매우 다른 시각적인 즐거움이 작동한다.
나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사진 속의 재조합된 입체적 공간이 평면적인 사진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감상자와 함께 새로운 건축사진으로서의 초현실주의적인 경험을 유희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