祭 (제) / 장지 위에 분채 / 130x97cm / 2024
머리카락은 매년 약 12cm씩 자란다.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자라나는 이 생명의 실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넘어선 내세까지 우리와 함께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한 번도 잘리지 않는 머리카락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어느 오래된 신화 속 이야기다.
태초의 신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환생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같은 영혼으로 세상에 돌아오길 반복하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그러나 신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 인간의 삶은 강물처럼 흘러 사라지고, 그 기억은 점차 희미해 진다. 어느 순간, 그가 지키고자 했던 사랑의 흔적마저 세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짝이는 조약돌이 물에 쓸려 언젠간 닳고 닳아 없어지고 마는 것처럼, 다시 태어나 같은 자리에 돌아오는 것 같아도 처음에 사랑했던 영혼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다.
그렇게 신은 죽음을 다짐한다.
그간 한 번도 자르지 못 했던 자신의 길고 긴 머리카락으로 상여를 만들기 시작한다.
사랑이 주었던 유일한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신은 이윽고 자신이 속했던 세계로부터,
그리고 삶으로부터 완전한 이방인이 된다.
나는 그런 신에게 편안한 죽음을 주는 것으로 위로해 주고 싶다.
자신이 길러낸 거대한 사랑의 요새 안에 파묻히도록.